2023년11월05일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사도행전18장5~8절)
작성자 오병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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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11-07 09:53
그들은 아덴에서 사도 바울의 명령에 따라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회로, 실라는 빌립보 교회로 파송되었었습니다. 바울은 신생 교회이기에 아직 온전한 믿음으로 서 있지 못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내외적인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 혹여라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까 염려가 되어, 자신을 대신하여 디모데를 그들에게 보내, 그들의 믿음을 굳건히 세우는 것에 도움을 주도록 했습니다. 또한 실라도 마찬가지로 빌립보 교회에 보내, 교회의 상황을 돌아보고, 또 자신의 든든한 후원교회였던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위한 중보기도를 요청하기 위해 파송했습니다. 그리고 실라와 디모데는 자신들에게 맡겨진 사역을 모두 마친 후에, 마게도냐에서 고린도에 있는 바울을 찾아와 다시 재회하게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 사도 바울은 걱정하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오히려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주님께 소망을 둔 인내로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주님을 본 받는 자가 되기 위해 힘씀으로,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넘어 각처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좋은 모범이 될 정도로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다는 소식을 디모데로부터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이 모든 일들의 출발점인 하나님 말씀에 압도되어, 그 말씀에 온전히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실라로부터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사랑과 정성이 담긴 헌금을 전해 받은 후, 자신을 향한 성도들의 사랑과 그들을 사용하시어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진 사역을 위해 하나님 말씀에 더욱 온전히 붙잡혀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는 유대인들을 향해 더욱 담대히 예수님의 그리스도되심에 대해 선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도 바울의 선포에 대해 유대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해 오늘 본문 6절 말씀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예수가 그리스도시라는 사도 바울의 선포를 들은 유대인들은 그를 대적하여 비방했습니다. 우리말 ‘비방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상의 뜻은 ‘명예를 훼손하다’, ‘욕설을 퍼붓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대적하다’에 해당하는 원어상의 뜻은 ‘저항, 대항하다’, ‘맞서게 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주로 단순한 반대의 차원을 넘어서 조직적으로 저항, 대립하는 것을 의미하며, 더욱이 오늘 본문에서 유사한 의미를 가진 두 동사를 반복하여 사용함으로 고린도의 유대인들이 마게도냐의 다른 지역의 유대인들이 보였던 반응보다도 더욱 심하게 바울을 핍박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습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반응에 대해 사도 바울은 다른 지역에서와는 달리 유대인들에게 옷을 털어버리면서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리라’라는 단호하고 강한 심판의 메시지를 선언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의 그리스도되심을 부정하고, 복음을 거부하는 그들의 완악함에 대해 사도 바울이 얼마나 분개했는지를 오늘 본문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편 옷에서 먼지를 터는 바울의 이러한 행동은 예수님께서 12사도와 70인의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그들을 영접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려 증거로 삼으라고 명령하신 것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옷에 묻어 있는 먼지 알갱이 하나라도 남기지 않고 철저하게 털어버리는 상징적 행동을 취하면서, 자신이 고린도의 유대인들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해 버렸음을 선언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들을 향해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고 선언한 것은, 바울 자신이 복음의 파수꾼이 되어, 자신의 사명대로 그 복음을 성실히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그에 대한 책임은 그것을 배척한 그들에게 있는 것이며,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선언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도 바울은 어느 지역에 가든 가장 먼저 그곳에 있는 유대인 회당에 찾아 들어가, 유대인들의 구원을 소원하면서 끊임없이 구원의 길을 제시했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유대인들은 끝끝내 생명의 말씀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대적하고 복음 전파를 훼방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먼지를 털어 버리며, 이후에는 이방인에게 갈 것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오늘 본문 7절 말씀입니다.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유대인들의 대적과 비방으로 인해 사도 바울은 복음 전파의 거점으로 삼았던 회당을 떠나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곳이 어디이며, 누구의 소유인지에 대해서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새로운 거점 장소로 선택한 곳은 ‘디도 유스도’라는 사람의 집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디도 유스도에 대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부연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는 부연 설명은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와 빌립보의 자주 옷감 장사인 루디아의 경우처럼, 그가 이방인이며,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디도’라는 이름은 로마식 이름으로서, 특별히 디도 가문은 그 가계에서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 많이 배출시킨, 소위 고린도의 명문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볼 때 본문의 디도 역시 이 고린도의 명문 가문에 속해 있는 로마 시민권자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그리고 ‘정의’라는 뜻을 가진 ‘유스도’라는 이름은 유대교로 개종할 때 그에게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되며, 많은 성서 신학자들은 이 ‘디도’의 본명이 ‘가이오’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디도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장에서 소개하는 것처럼 바울이 전도 여행 초기에 개인적으로 세례를 준, 회심자들 중의 한 사람일 것으로 추정되며, 바울이 로마서 16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것처럼 고린도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던 중심인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을 기록한 ‘누가’는 디도 유스도의 집이 회당 옆이었다며 그 위치를 상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원어성경에서는 유스도의 집이 단지 회당과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회당 바로 옆에 붙어 있었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누가가 굳이 이러한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은 디도 유스도의 집이 회당 옆에 붙어 있다는 사실이 전해주는 특별한 의미를 보여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이는 먼저 유스도의 경건함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회당에서 말씀 배우기에 힘썼기 때문에 회당과 붙어 있는 집에 거했을 것이라는 암시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또 다른 면에서 이는 바울의 복음 전파 사역이 비록 회당을 떠나 이루어지긴 했지만, 회당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즉 이는 바울이 회당에 예배드리려고 오는 자들을 상대로 복음 전파하는 일에 힘썼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한편 디도 유스도의 집은 고린도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로 추정됩니다. 즉 디도 유스도는 자신의 집을 그리스도인들이 집회를 가질 수 있는 장소로 제공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 구절이 원어성경에서는 미완료형으로 기록되어, 계속의 의미를 나타낸다는 점에서도 확인됩니다. 즉 디도 유스도의 집은 바울이 복음 사역의 거점으로 삼은 때로부터 계속하여 그리스도인들의 모임 장소로 사용되었던 예배 처소이자 교제의 장소였던 것입니다. 본서를 기록한 누가가 사도 바울이 선택한 새로운 복음사역 거점을 디도 유스도의 집이라고 밝히고 있다는 것은, 이곳이 이미 당시 고린도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진 모임 장소였음을 암시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서도 디도 유스도의 집이 교회로 쓰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집으로부터 시작된 복음 사역의 열매에 대해 오늘 본문 8절 말씀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고린도교회, 디도 유스도의 집에서 시작된 복음 사역에서 얻게 된 첫 번째 열매는 회당장 그리스보였습니다. 그리스보가 회당장이었다는 것은 그가 유대인이었음을 의미하며, 아마도 그는 고린도에 있는 여러 회당 가운데 한 회당의 회당장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부분의 고린도 유대인들이 바울의 복음 전도에 대하여 매우 적대적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회당장 그리스보는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온 가족과 더불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14절에 의하면 ‘가이오’로 추정되는 디도 유스도와 더불어 그는 바울로부터 직접 세례를 받았으며, 유대 사회의 비중 있는 지도자인 그리스보의 회심은 복음 사역자인 바울에게는 커다란 힘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고린도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에 오늘 본문은 회당장 그리스보의 회심이 전도의 기폭제가 되어, 그 결과 수많은 고린도 사람들도 믿음을 갖게 되었으며, 바울로부터 세례를 받게 되었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절의 기원은 구약 성경 속 수장절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근거합니다. ‘수장절’이란, 한 해 동안 농사 지어 얻은 수확물을 저장하는 절기라는 의미이며, 이는 한 해 농사를 지은 결실을 추수한 후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인 추수감사절로 연결되어, 오늘날까지 지켜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에서는 수장절과 초막절을 같은 절기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수장절과 동시에 초막절을 일주일간 지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곡식을 수확하여 저장한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일주일간 초막에 거하면서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초막절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한 후 초막에 거하면서 광야 생활을 했던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이며, 특별히 그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고 추수한 곡식이 없었어도, 황량한 광야에서 그들을 친히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며,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약속의 땅에 들어와 수장절까지 지킬 수 있게 된 것임을 마음에 되새기는 절기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수장절에 이처럼 초막절을 지키라 명령하신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추수하여 얻은 풍성한 곡식들을 수장해 놓았으나, 그 쌓아놓은 수확물 즉 물질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베풀어 주신 은혜를 헤아리며, 더욱 겸손하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살아가야함을, 초막에 거하면서 되새기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들은 풍요의 땅 가나안에 거하면서, 가나안 사람들처럼 이 땅에 풍요를 삶의 목적으로 두지 않고,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더 많은 것을 쌓아두려는 욕심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으며, 가나안 사람들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수장절, 초막절, 추수감사주일은 단지 한 해 동안 수고하여 얻게 된 결실을 바라보며, 단순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며 감사하는 절기의 의미를 넘어섭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익은 곡식처럼 성숙해진 나의 신앙과 내 자신의 영혼과 삶을 열매로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레위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초막절을 지킬 때에는 네 가지 식물을 취하여, 일주일간 초막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네 가지 식물을 히브리어로 ‘아르바 미님’이라 부르는데, 이 네 가지 식물은 영적으로 네 종류의 사람을 의미한다고 유대인들의 성경 주석서인 ‘레위기 미드나쉬’는 해석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식물은 ‘아름다운 실과’로서 맛이 있고 향기도 나는 실과로서, 이는 성경의 말씀을 매일 읽고, 듣고, 연구하고, 암기하고 묵상하여 실제의 삶에 적용하여 살아 내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식물은 ‘종려나무’로서 맛은 있으나 향이 없는 식물로서, 말씀을 배우나 실천하지 않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 나무를 바라보며, 자신이 귀한 말씀을 깨달아 알고도, 내 삶에 적용하지 않고 그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아니었는지 돌아보도록 가르쳐주는 식물입니다. 세 번째 식물은 ‘무성한 가지’로, 비록 맛은 없지만 향기가 나는 식물로서, 비록 말씀을 배우지 못했지만 양심에 따라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 식물은 ‘시내버들’로서 맛도 없고 향기도 없는 식물이며, 말씀도 배우지 않고 실천도 하지 않는 사람을 의미하며, 오로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이 네 가지 식물을 초막에 장식하고, 또 그 가지를 흔들며 자신이 어떤 사람에 속해 있는가를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를, 또 내가 속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 백성다운 삶을 살기로 다짐하는 절기가 바로 초막절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추수감사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께 내어 드릴 수 있는 결실과 우리가 하나님께 고백해야 할 감사의 제목은, 한 해 동안 우리의 수고를 통해 얻게 된 눈에 보이는 결실을 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결실이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 디도 유스도는 비록 이방인이지만, 사도 바울이 증언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구원을 얻은 후, 기꺼이 자신의 집을 성도들의 예배 처소로 내어 놓았습니다. 이전까지 그의 집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 살아온 그의 삶을 대변하는 상징이었을 것입니다. 고린도 명문가에, 로마 시민권을 가진 그는 일평생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고, 영적 열매를 맺기 위해 자신의 집까지 내어 놓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의 집을 예배의 처소로 삼으시고, 그의 집을 통해 수많은 구원의 열매가 맺어지도록 역사하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보 역시 유대인의 회당장이라는 유대 사회에서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삶을 살아가던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유대교를 떠나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가 되었으며, 그와 그의 온 집이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아, 고린도 땅의 복음의 기폭제가 되어, 그를 통해 수많은 고린도 땅의 생명의 열매를 맺는 복된 자가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그리스보는 후에 아에기나의 목회자가 되었다고 전해줌으로, 그가 이제는 자신의 전생애를 복음전파에 온전히 헌신하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었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의 이름을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하여 주심으로, 그들의 이름을 영원토록 기억되게 하셨으며, 그들의 신앙을 본받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추수감사주일을 맞은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로부터 가장 기뻐 받으시기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라 생각되십니까?
하나님께서 듣기 원하시는 감사의 제목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눈에 보여지는 결실이나 성과, 그에 따른 감사를 원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거나 기대하는 것보다 결실이 적은 사람은 결코 하나님께 참된 감사를 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초막에 거하라 명령하신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지 않고 더욱 겸손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가나안 땅 같은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삶일 것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이 무르익은 곡식처럼 성숙한 신앙의 결실을 하나님께 올려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단지 당신의 백성들을 풍요롭게 하는 이방신과 같은 분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과 생명을 풍요롭게 하시는 참 하나님이심을 나타내 보이는 것일 것입니다.
나아가 이방인 디도 유스도처럼, 회당장 그리스보처럼 나의 삶이 또 다른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는 구원의 통로로 쓰임 받기 위해, 결단하고 다짐하는 우리의 믿음의 모습일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드림으로,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추수감사주일 예배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참된 감사의 제사로 열납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홀로 도착한 바울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본도 출신의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자 천막 제조업자였던 아굴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를 예비해 두셨다가 바울과 함께 동역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한 동안 바울과 떨어져 있었던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와 고린도에서 바울과 재회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덴에서 사도 바울의 명령에 따라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회로, 실라는 빌립보 교회로 파송되었었습니다. 바울은 신생 교회이기에 아직 온전한 믿음으로 서 있지 못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내외적인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 혹여라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까 염려가 되어, 자신을 대신하여 디모데를 그들에게 보내, 그들의 믿음을 굳건히 세우는 것에 도움을 주도록 했습니다. 또한 실라도 마찬가지로 빌립보 교회에 보내, 교회의 상황을 돌아보고, 또 자신의 든든한 후원교회였던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위한 중보기도를 요청하기 위해 파송했습니다. 그리고 실라와 디모데는 자신들에게 맡겨진 사역을 모두 마친 후에, 마게도냐에서 고린도에 있는 바울을 찾아와 다시 재회하게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 사도 바울은 걱정하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오히려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주님께 소망을 둔 인내로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주님을 본 받는 자가 되기 위해 힘씀으로,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넘어 각처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좋은 모범이 될 정도로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다는 소식을 디모데로부터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이 모든 일들의 출발점인 하나님 말씀에 압도되어, 그 말씀에 온전히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실라로부터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사랑과 정성이 담긴 헌금을 전해 받은 후, 자신을 향한 성도들의 사랑과 그들을 사용하시어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진 사역을 위해 하나님 말씀에 더욱 온전히 붙잡혀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는 유대인들을 향해 더욱 담대히 예수님의 그리스도되심에 대해 선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도 바울의 선포에 대해 유대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해 오늘 본문 6절 말씀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예수가 그리스도시라는 사도 바울의 선포를 들은 유대인들은 그를 대적하여 비방했습니다. 우리말 ‘비방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상의 뜻은 ‘명예를 훼손하다’, ‘욕설을 퍼붓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대적하다’에 해당하는 원어상의 뜻은 ‘저항, 대항하다’, ‘맞서게 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주로 단순한 반대의 차원을 넘어서 조직적으로 저항, 대립하는 것을 의미하며, 더욱이 오늘 본문에서 유사한 의미를 가진 두 동사를 반복하여 사용함으로 고린도의 유대인들이 마게도냐의 다른 지역의 유대인들이 보였던 반응보다도 더욱 심하게 바울을 핍박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습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반응에 대해 사도 바울은 다른 지역에서와는 달리 유대인들에게 옷을 털어버리면서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리라’라는 단호하고 강한 심판의 메시지를 선언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의 그리스도되심을 부정하고, 복음을 거부하는 그들의 완악함에 대해 사도 바울이 얼마나 분개했는지를 오늘 본문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편 옷에서 먼지를 터는 바울의 이러한 행동은 예수님께서 12사도와 70인의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그들을 영접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려 증거로 삼으라고 명령하신 것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옷에 묻어 있는 먼지 알갱이 하나라도 남기지 않고 철저하게 털어버리는 상징적 행동을 취하면서, 자신이 고린도의 유대인들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해 버렸음을 선언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들을 향해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고 선언한 것은, 바울 자신이 복음의 파수꾼이 되어, 자신의 사명대로 그 복음을 성실히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그에 대한 책임은 그것을 배척한 그들에게 있는 것이며,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선언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도 바울은 어느 지역에 가든 가장 먼저 그곳에 있는 유대인 회당에 찾아 들어가, 유대인들의 구원을 소원하면서 끊임없이 구원의 길을 제시했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유대인들은 끝끝내 생명의 말씀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대적하고 복음 전파를 훼방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먼지를 털어 버리며, 이후에는 이방인에게 갈 것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오늘 본문 7절 말씀입니다.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유대인들의 대적과 비방으로 인해 사도 바울은 복음 전파의 거점으로 삼았던 회당을 떠나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곳이 어디이며, 누구의 소유인지에 대해서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새로운 거점 장소로 선택한 곳은 ‘디도 유스도’라는 사람의 집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디도 유스도에 대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부연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는 부연 설명은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와 빌립보의 자주 옷감 장사인 루디아의 경우처럼, 그가 이방인이며,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디도’라는 이름은 로마식 이름으로서, 특별히 디도 가문은 그 가계에서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 많이 배출시킨, 소위 고린도의 명문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볼 때 본문의 디도 역시 이 고린도의 명문 가문에 속해 있는 로마 시민권자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그리고 ‘정의’라는 뜻을 가진 ‘유스도’라는 이름은 유대교로 개종할 때 그에게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되며, 많은 성서 신학자들은 이 ‘디도’의 본명이 ‘가이오’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디도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장에서 소개하는 것처럼 바울이 전도 여행 초기에 개인적으로 세례를 준, 회심자들 중의 한 사람일 것으로 추정되며, 바울이 로마서 16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것처럼 고린도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던 중심인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을 기록한 ‘누가’는 디도 유스도의 집이 회당 옆이었다며 그 위치를 상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원어성경에서는 유스도의 집이 단지 회당과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회당 바로 옆에 붙어 있었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누가가 굳이 이러한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은 디도 유스도의 집이 회당 옆에 붙어 있다는 사실이 전해주는 특별한 의미를 보여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이는 먼저 유스도의 경건함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회당에서 말씀 배우기에 힘썼기 때문에 회당과 붙어 있는 집에 거했을 것이라는 암시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또 다른 면에서 이는 바울의 복음 전파 사역이 비록 회당을 떠나 이루어지긴 했지만, 회당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즉 이는 바울이 회당에 예배드리려고 오는 자들을 상대로 복음 전파하는 일에 힘썼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한편 디도 유스도의 집은 고린도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로 추정됩니다. 즉 디도 유스도는 자신의 집을 그리스도인들이 집회를 가질 수 있는 장소로 제공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 구절이 원어성경에서는 미완료형으로 기록되어, 계속의 의미를 나타낸다는 점에서도 확인됩니다. 즉 디도 유스도의 집은 바울이 복음 사역의 거점으로 삼은 때로부터 계속하여 그리스도인들의 모임 장소로 사용되었던 예배 처소이자 교제의 장소였던 것입니다. 본서를 기록한 누가가 사도 바울이 선택한 새로운 복음사역 거점을 디도 유스도의 집이라고 밝히고 있다는 것은, 이곳이 이미 당시 고린도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진 모임 장소였음을 암시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서도 디도 유스도의 집이 교회로 쓰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집으로부터 시작된 복음 사역의 열매에 대해 오늘 본문 8절 말씀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고린도교회, 디도 유스도의 집에서 시작된 복음 사역에서 얻게 된 첫 번째 열매는 회당장 그리스보였습니다. 그리스보가 회당장이었다는 것은 그가 유대인이었음을 의미하며, 아마도 그는 고린도에 있는 여러 회당 가운데 한 회당의 회당장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부분의 고린도 유대인들이 바울의 복음 전도에 대하여 매우 적대적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회당장 그리스보는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온 가족과 더불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14절에 의하면 ‘가이오’로 추정되는 디도 유스도와 더불어 그는 바울로부터 직접 세례를 받았으며, 유대 사회의 비중 있는 지도자인 그리스보의 회심은 복음 사역자인 바울에게는 커다란 힘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고린도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에 오늘 본문은 회당장 그리스보의 회심이 전도의 기폭제가 되어, 그 결과 수많은 고린도 사람들도 믿음을 갖게 되었으며, 바울로부터 세례를 받게 되었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절의 기원은 구약 성경 속 수장절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근거합니다. ‘수장절’이란, 한 해 동안 농사 지어 얻은 수확물을 저장하는 절기라는 의미이며, 이는 한 해 농사를 지은 결실을 추수한 후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인 추수감사절로 연결되어, 오늘날까지 지켜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에서는 수장절과 초막절을 같은 절기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수장절과 동시에 초막절을 일주일간 지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곡식을 수확하여 저장한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일주일간 초막에 거하면서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초막절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한 후 초막에 거하면서 광야 생활을 했던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이며, 특별히 그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고 추수한 곡식이 없었어도, 황량한 광야에서 그들을 친히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며,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약속의 땅에 들어와 수장절까지 지킬 수 있게 된 것임을 마음에 되새기는 절기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수장절에 이처럼 초막절을 지키라 명령하신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추수하여 얻은 풍성한 곡식들을 수장해 놓았으나, 그 쌓아놓은 수확물 즉 물질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베풀어 주신 은혜를 헤아리며, 더욱 겸손하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살아가야함을, 초막에 거하면서 되새기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들은 풍요의 땅 가나안에 거하면서, 가나안 사람들처럼 이 땅에 풍요를 삶의 목적으로 두지 않고,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더 많은 것을 쌓아두려는 욕심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으며, 가나안 사람들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수장절, 초막절, 추수감사주일은 단지 한 해 동안 수고하여 얻게 된 결실을 바라보며, 단순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며 감사하는 절기의 의미를 넘어섭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익은 곡식처럼 성숙해진 나의 신앙과 내 자신의 영혼과 삶을 열매로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레위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초막절을 지킬 때에는 네 가지 식물을 취하여, 일주일간 초막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네 가지 식물을 히브리어로 ‘아르바 미님’이라 부르는데, 이 네 가지 식물은 영적으로 네 종류의 사람을 의미한다고 유대인들의 성경 주석서인 ‘레위기 미드나쉬’는 해석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식물은 ‘아름다운 실과’로서 맛이 있고 향기도 나는 실과로서, 이는 성경의 말씀을 매일 읽고, 듣고, 연구하고, 암기하고 묵상하여 실제의 삶에 적용하여 살아 내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식물은 ‘종려나무’로서 맛은 있으나 향이 없는 식물로서, 말씀을 배우나 실천하지 않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 나무를 바라보며, 자신이 귀한 말씀을 깨달아 알고도, 내 삶에 적용하지 않고 그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아니었는지 돌아보도록 가르쳐주는 식물입니다. 세 번째 식물은 ‘무성한 가지’로, 비록 맛은 없지만 향기가 나는 식물로서, 비록 말씀을 배우지 못했지만 양심에 따라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 식물은 ‘시내버들’로서 맛도 없고 향기도 없는 식물이며, 말씀도 배우지 않고 실천도 하지 않는 사람을 의미하며, 오로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이 네 가지 식물을 초막에 장식하고, 또 그 가지를 흔들며 자신이 어떤 사람에 속해 있는가를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를, 또 내가 속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 백성다운 삶을 살기로 다짐하는 절기가 바로 초막절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추수감사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께 내어 드릴 수 있는 결실과 우리가 하나님께 고백해야 할 감사의 제목은, 한 해 동안 우리의 수고를 통해 얻게 된 눈에 보이는 결실을 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결실이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 디도 유스도는 비록 이방인이지만, 사도 바울이 증언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구원을 얻은 후, 기꺼이 자신의 집을 성도들의 예배 처소로 내어 놓았습니다. 이전까지 그의 집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 살아온 그의 삶을 대변하는 상징이었을 것입니다. 고린도 명문가에, 로마 시민권을 가진 그는 일평생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고, 영적 열매를 맺기 위해 자신의 집까지 내어 놓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의 집을 예배의 처소로 삼으시고, 그의 집을 통해 수많은 구원의 열매가 맺어지도록 역사하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보 역시 유대인의 회당장이라는 유대 사회에서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삶을 살아가던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유대교를 떠나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가 되었으며, 그와 그의 온 집이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아, 고린도 땅의 복음의 기폭제가 되어, 그를 통해 수많은 고린도 땅의 생명의 열매를 맺는 복된 자가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그리스보는 후에 아에기나의 목회자가 되었다고 전해줌으로, 그가 이제는 자신의 전생애를 복음전파에 온전히 헌신하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었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의 이름을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하여 주심으로, 그들의 이름을 영원토록 기억되게 하셨으며, 그들의 신앙을 본받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추수감사주일을 맞은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로부터 가장 기뻐 받으시기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라 생각되십니까?
하나님께서 듣기 원하시는 감사의 제목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눈에 보여지는 결실이나 성과, 그에 따른 감사를 원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거나 기대하는 것보다 결실이 적은 사람은 결코 하나님께 참된 감사를 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초막에 거하라 명령하신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지 않고 더욱 겸손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가나안 땅 같은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삶일 것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이 무르익은 곡식처럼 성숙한 신앙의 결실을 하나님께 올려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단지 당신의 백성들을 풍요롭게 하는 이방신과 같은 분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과 생명을 풍요롭게 하시는 참 하나님이심을 나타내 보이는 것일 것입니다.
나아가 이방인 디도 유스도처럼, 회당장 그리스보처럼 나의 삶이 또 다른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는 구원의 통로로 쓰임 받기 위해, 결단하고 다짐하는 우리의 믿음의 모습일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드림으로,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추수감사주일 예배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참된 감사의 제사로 열납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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