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11월19일 소스데네를 때리되(사도행전18장12~17절)
작성자 오병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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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11-20 14:00
자신들의 조직적인 대적과 비방으로 바울을 회당에서 내쫓다시피 내보낸 이후, 이제는 바울의 사역이 위축될 것이라 생각했던 고린도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달리 복음이 더욱 확장하게 되자 큰 위기감을 느끼고, 이전보다 더욱 집요하고 강하게 사도 바울을 압박하고 괴롭혔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위협까지 가했습니다. 이런 상황들이 지속되자 어느 순간 사도 바울은 큰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고, 이전과는 달리 유대인들 앞에서 침묵하며, 다른 곳에서의 사역을 생각하며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 바울에게 주님께서 한 밤 중 환상으로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언제나 너와 함께 있을 것이며, 그 누구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하지 못하도록 지켜주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고린도 땅에는 구원 받아야 할 당신의 백성들이 많기에, 그들이 구원받기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멈춰서는 안 된다고 바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1년6개월이나 되는 긴 시간을 고린도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고린도 사람들에게 담대히 가르쳤음을 지난주일 말씀을 통해 함께 상고해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에서 바울이 1년6개월 체류하는 동안 겪었던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2~13절 말씀입니다.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오늘 본문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대적하여 그를 법정으로 데리고 가 고소한 사건에 대해 전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은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시간적 배경에 대해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라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리스 남부 지역인 아가야의 총독으로 부임한 갈리오는 네로 황제의 스승이라고 알려진 세네카의 친형제로서, 중앙 그리스에 있는 신전 델피의 비문에 의하면 그는 주후 51~52년 경에 아가야의 총독으로 부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사역한 시기가 언제였는지를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편 ‘갈리오가 아가야의 총독이 되었을 때’라는 것은, 본문 속 고소 사건이 갈리오가 아가야의 총독으로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에 일어난 사건임을 의미합니다. 아마도 고린도의 유대인들은 이제 막 새로 부임한 총독이 현지 사정에 대해 어둡고, 또 여론을 의식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바대로 편파적인 판결을 내릴 것이라고 생각하여, 계획적으로 이 시기에 사도 바울을 갈리오 총독 앞으로 끌고 가 고소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은 고린도의 유대인들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고소했음을 밝혀주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사도 바울을 고소하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또 일심동체가 되어 움직였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원어성경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부정과거 능동태’로 기록함으로, 그들이 바울을 법정에 세워 고소하기 위해 기습적으로 그를 붙잡아 법정에 세운 것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들의 이러한 모습들은 고린도의 유대인들이 지금 얼마나 급박하고 다급했는지를 가늠하게 해 주며, 또한 이 일을 위해 그들이 얼마나 세밀하게 계획했는지를 알게 해 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일련의 행동들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신들의 조직적이고 강도 있는 대적과 비방, 생명의 위협을 통해 사도 바울이 두려움에 빠져, 침묵하고, 복음을 더 이상 전하지 않게 되자, 자신들의 뜻대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지만, 사도 바울이 환상 중의 주님의 명령과 약속을 들은 후, 고린도를 떠나지 않고 오히려 더욱 담대하게 열과 성을 다해 복음을 전하며, 고린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자, 새로 부임한 총독 갈리오을 이용하여 이번 기회에 바울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일제히 일어나 그를 법정에 세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총독 갈리오에게 사도 바울을 고발한 내용은 바울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원어성경은 그들이 이러한 사실들을 단순히 말을 한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반복하여 고함을 치듯 소리쳤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사도 바울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흥분된 상태에서 사도 바울을 법정에 세운 것이었습니다. 한편 본문 속에서 ‘율법’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모세의 율법이라는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닌, 로마의 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들은 지금 바울을 로마법을 어긴 죄목으로 고소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자신들이 공인한 종교에 한해서만 포교활동을 허락했습니다. 즉 고린도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지금 로마법에 의해서 공인되지 못한 ‘불법적 종교 유포 행위’로 고소한 것입니다.
덧붙여 그들은 바울이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며 고소했습니다. 이는 이들이 고소한 내용이 종교적인 문제임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것을 정치적인 문제로 만들어 바울을 고소한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대인들 또한 자신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임에도, 바울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권하는 것이 마치 불법인양 고소해 버림으로써, ‘자가당착’에 빠지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고린도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제거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점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억지 주장만을 늘어놓은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주장에 대해 총독 갈리오가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해 오늘 본문 14~15절 말씀이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고”
유대인들의 억지 주장에 대해 사도 바울이 자신의 입장을 변론하려고 입을 열려는 순간, 총독 갈리오는 유대인의 고소를 그들의 종교 문제로 파악하고, 자체 해결을 지시하며, 그들의 고소를 기각해 버렸습니다. 총독 갈리오는 유대인들의 바울에 대한 고소가,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과 같은 불법에 관한 것이라면 자신이 마땅히 심리해야 하겠지만, 그 고소가 유대교 내의 문제일 뿐 바울이 로마법에 저촉되는 일을 하였다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고소 자체를 기각시킨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총독 갈리오는 유대인들의 고소 내용이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라고 단정 지었습니다. 여기서 ‘언어’에 해당하는 원어상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므로, 언어 문제란 바울이 구약 성경을 풀이하여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는 것에 관한 문제임을 의미하며, ‘명칭’에 관한 문제란 사도 바울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예수가 그리스도라 부를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임을 의미하며, ‘법’에 관한 문제란 유대인의 법 즉 율법에 관한 문제임을 의미합니다. 총독 갈리오는 유대인들의 고소 내용을 듣고, 이것이 유대인들의 종교에 관한 문제라고 명확히 판단하고,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은 재판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 스스로 해결할 것을 명령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오늘 본문 16절 말씀입니다.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니”
총독 갈리오는 바울을 고소했던 유대인들을 법정에서 쫓아냈습니다. 원어성경은 갈리오 총독이 군인들을 동원하여 그들을 강제로 법정에서 몰아냈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총독 갈리오는 유대인들의 고소를 종교에 관한 문제라 여겨 기각하면서 법정을 산회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유대인들은 갈리오 총독의 기각 선고를 듣고도 물러나려고 하지 않고, 갈리오 총독을 설득시키기 위해 법정에 계속 남아,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자 총독 갈리오는 자신의 명령에 불복하며 억지떼를 쓰는 유대인들을 자신의 부하들을 시켜 법정 밖으로 강제로 몰아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법정 밖에서는 유대인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 17절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
모든 사람이 법정 밖으로 내쫓긴 유대인 가운데 ‘회당장 소스데네’를 붙잡아 법정 앞에서 때렸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사람’이란 법정을 참관하고 있던 고린도의 헬라인들로 추정됩니다. 당시에는 법정이 지금처럼 밀폐된 건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공개적인 장소였으므로, 아마도 고린도의 헬라인들은 지나가는 길에, 유대인들의 무리들이 바울을 끌고 가 소란스럽게 고소하는 것을 보고, 자연스럽게 법정을 참관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 또한 총독 갈리오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이 말하는 바울의 고소내용들이 억지 주장에 불과하며, 종교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총독 갈리오가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유대인들의 고소를 기각시키는 것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총독 갈리오의 명령에 굴복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며, 강제로 그들을 법정에 몰아낼 때까지 소란을 피우자, 고린도의 헬라인들은 유대인 무리의 총 책임자로 보이는 회당장 소스데네를 붙잡아 집단 폭행을 가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바울을 고소하는 일에 회당장 소스데네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회당장 소스데네는 유대인 무리를 통솔하여 바울을 붙잡아 법정으로 나아갔을 것이며, 총독 갈리오에게 왜 바울을 고소하는지 그 내용을 진술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총독 갈리오가 그의 고소를 기각했을 때에도, 아마 소스데네가 앞장서서 가장 많은 말을 하며 갈리오 총독을 설득하려 들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고린도의 헬라인들은 자연스럽게 그를 유대인들의 총책임자로 여기게 되었던 것이며, 이에 그를 붙잡아 집단으로 폭행을 가한 것입니다.
원어성경은 헬라인들의 폭행이 한 동안 지속되었으며, 그에게 심한 폭력을 가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소스데네를 비롯한 유대인들에 대한 헬라인들의 분노가 얼마나 큰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8장2절 말씀을 통해 살펴본 것처럼, 2년 전 로마에서 종교적인 문제로 유대인들끼리 폭동이 일어나자 글라우디오 황제는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해 버렸습니다. 이 일을 비롯하여 그리스와 로마 사회에서는 반유대주의 경향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속 헬라인들 역시도 소스데네를 비롯한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며 그들의 오만방자함에 대해 반유대주의적인 감정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에 집단적으로 회당장 소스데네에게 심한 폭력을 행사한 것입니다. 결국 소스데네를 비롯한 유대인들은 바울을 무고하게 고소함으로 위해를 가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회당장 소스데네는 헬라인들로부터 큰 해를 당하게 되었으며, 고린도에서 유대인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한편 법정 앞에서 회당장 소스데네가 헬라인들로부터 집단 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보고도, 갈리오 총독이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으며, 심지어 소스데네와 함께 온 유대인들마저도 아무도 그에게 도움을 주지 않고 방관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바울을 악랄하게 괴롭혔던 소스데네를 향한 하나님의 지엄하신 이 땅에서의 심판임을 본문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영적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앞서 말씀드렸듯이 지난 주 우리가 함께 본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며, 그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시면서,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고, 믿음으로 다시 힘을 내어 고린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가르쳤습니다. 오늘 본문 속 사건은 그런 사도 바울의 믿음에 주님께서 보여주신 응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속 소스데네를 비롯한 유대인들의 사도 바울에 대한 대적은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지만, 주님은 사도 바울이 자신에 대해 입을 열기도 전에 갈리오 총독을 사용하셔서, 그들이 바울을 해할 수 없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라는 당신의 약속을 주님께서 지키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내용이 고린도에서의 사도 바울의 마지막 행적임을 볼 때, 이 일이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1년6개월 동안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믿음에 대한 주님의 응답하심이 그에게는 그 어떤 장애물이나 방해에도 이전처럼 두려워하지 않고 주어진 사역을 온전히 감당할 힘과 능력이 되는 귀중한 영적 경험이었던 것입니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갈리오 총독의 이번 판결이 선례가 되어, 유대인들이 종교적인 문제로 더 이상 바울을 비롯한 복음 전도자들을 고소할 수 없게 됨으로, 바울의 선교 활동이 용이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유대교 열렬한 지지자였던 포패아 사비나와 네로 황제가 결혼한 주후 62년경까지 복음 전파에 순풍이 불게 되었습니다. 즉 갈리오 총독의 이번 판결이 적어도 10년 간은 복음 전도자들에게 용기와 힘을 실어준 결과를 낳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믿음대로 행한 자들에게 놀라운 역사로 응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본다면, 만일 주님의 말씀에 믿음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결코 주님의 이와 같은 놀라운 역사를 경험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환상 속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고도, 그것을 단지 무의식중에 든 자신의 망상으로 치부해 버리고, 자신의 생각대로 고린도를 떠났더라면, 주님이 자신을 위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그는 결코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믿음대로 행했기에, 환상 속에 자신에게 약속해 주셨던 주님께서, 정말 자신을 위해 친히 역사해 주시는 분이심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렇기에 그는 고린도 뿐 아니라 로마에서 순교하는 그 순간까지 우리가 아는 위대한 사도 바울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그분의 말씀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뒤집어 말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 그 말씀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진실이 아닐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면서 그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의 말씀대로 살 때, 우리는 참 믿음의 사람이 말할 수 있을 것이요, 본문 속 바울처럼 나의 입을 열기도 전에 나의 믿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항상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분의 말씀대로 행함으로, 그런 내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만, 우리 앞에 어떤 대적이 와도, 또 나를 해롭게 할 수 있는 어떤 순간이 와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나의 신앙을 지키며, 내 삶에 부여된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야만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이 땅을 새롭게 일구는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가,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감으로, 그런 내게 응답하시고 역사하시는 주님을 경험함으로, 일평생 여러분의 모든 신앙의 삶들이 풍성한 영적 경험들과 은혜로 충만할 수 있기를, 이를 통해 어떤 장애물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고, 언제나 승리하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고린도의 유대인들이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복음을 대적하고 복음 전파를 조직적으로 대적하고 비방하는 데 앞장서자, 사도 바울은 그들을 향해 먼지를 털어 버리며,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리라’고 선포한 후에, 자신은 이제 이방인에게 갈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복음 전파의 거점으로 삼았던 회당을 떠나, 회당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디도 유스도’라는 사람의 집을 새로운 복음사역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유대교 회당장 그리스보와 그의 온 가족이 예수님을 자신들의 구주로 고백한 것을 비롯하여, 수많은 고린도 사람들도 믿음을 갖고 바울로부터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조직적인 대적과 비방으로 바울을 회당에서 내쫓다시피 내보낸 이후, 이제는 바울의 사역이 위축될 것이라 생각했던 고린도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달리 복음이 더욱 확장하게 되자 큰 위기감을 느끼고, 이전보다 더욱 집요하고 강하게 사도 바울을 압박하고 괴롭혔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위협까지 가했습니다. 이런 상황들이 지속되자 어느 순간 사도 바울은 큰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고, 이전과는 달리 유대인들 앞에서 침묵하며, 다른 곳에서의 사역을 생각하며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 바울에게 주님께서 한 밤 중 환상으로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언제나 너와 함께 있을 것이며, 그 누구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하지 못하도록 지켜주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고린도 땅에는 구원 받아야 할 당신의 백성들이 많기에, 그들이 구원받기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멈춰서는 안 된다고 바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1년6개월이나 되는 긴 시간을 고린도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고린도 사람들에게 담대히 가르쳤음을 지난주일 말씀을 통해 함께 상고해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에서 바울이 1년6개월 체류하는 동안 겪었던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2~13절 말씀입니다.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오늘 본문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대적하여 그를 법정으로 데리고 가 고소한 사건에 대해 전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은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시간적 배경에 대해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라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리스 남부 지역인 아가야의 총독으로 부임한 갈리오는 네로 황제의 스승이라고 알려진 세네카의 친형제로서, 중앙 그리스에 있는 신전 델피의 비문에 의하면 그는 주후 51~52년 경에 아가야의 총독으로 부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사역한 시기가 언제였는지를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편 ‘갈리오가 아가야의 총독이 되었을 때’라는 것은, 본문 속 고소 사건이 갈리오가 아가야의 총독으로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에 일어난 사건임을 의미합니다. 아마도 고린도의 유대인들은 이제 막 새로 부임한 총독이 현지 사정에 대해 어둡고, 또 여론을 의식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바대로 편파적인 판결을 내릴 것이라고 생각하여, 계획적으로 이 시기에 사도 바울을 갈리오 총독 앞으로 끌고 가 고소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은 고린도의 유대인들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고소했음을 밝혀주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사도 바울을 고소하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또 일심동체가 되어 움직였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원어성경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부정과거 능동태’로 기록함으로, 그들이 바울을 법정에 세워 고소하기 위해 기습적으로 그를 붙잡아 법정에 세운 것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들의 이러한 모습들은 고린도의 유대인들이 지금 얼마나 급박하고 다급했는지를 가늠하게 해 주며, 또한 이 일을 위해 그들이 얼마나 세밀하게 계획했는지를 알게 해 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일련의 행동들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신들의 조직적이고 강도 있는 대적과 비방, 생명의 위협을 통해 사도 바울이 두려움에 빠져, 침묵하고, 복음을 더 이상 전하지 않게 되자, 자신들의 뜻대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지만, 사도 바울이 환상 중의 주님의 명령과 약속을 들은 후, 고린도를 떠나지 않고 오히려 더욱 담대하게 열과 성을 다해 복음을 전하며, 고린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자, 새로 부임한 총독 갈리오을 이용하여 이번 기회에 바울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일제히 일어나 그를 법정에 세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총독 갈리오에게 사도 바울을 고발한 내용은 바울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원어성경은 그들이 이러한 사실들을 단순히 말을 한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반복하여 고함을 치듯 소리쳤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사도 바울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흥분된 상태에서 사도 바울을 법정에 세운 것이었습니다. 한편 본문 속에서 ‘율법’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모세의 율법이라는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닌, 로마의 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들은 지금 바울을 로마법을 어긴 죄목으로 고소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자신들이 공인한 종교에 한해서만 포교활동을 허락했습니다. 즉 고린도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지금 로마법에 의해서 공인되지 못한 ‘불법적 종교 유포 행위’로 고소한 것입니다.
덧붙여 그들은 바울이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며 고소했습니다. 이는 이들이 고소한 내용이 종교적인 문제임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것을 정치적인 문제로 만들어 바울을 고소한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대인들 또한 자신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임에도, 바울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권하는 것이 마치 불법인양 고소해 버림으로써, ‘자가당착’에 빠지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고린도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제거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점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억지 주장만을 늘어놓은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주장에 대해 총독 갈리오가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해 오늘 본문 14~15절 말씀이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고”
유대인들의 억지 주장에 대해 사도 바울이 자신의 입장을 변론하려고 입을 열려는 순간, 총독 갈리오는 유대인의 고소를 그들의 종교 문제로 파악하고, 자체 해결을 지시하며, 그들의 고소를 기각해 버렸습니다. 총독 갈리오는 유대인들의 바울에 대한 고소가,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과 같은 불법에 관한 것이라면 자신이 마땅히 심리해야 하겠지만, 그 고소가 유대교 내의 문제일 뿐 바울이 로마법에 저촉되는 일을 하였다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고소 자체를 기각시킨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총독 갈리오는 유대인들의 고소 내용이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라고 단정 지었습니다. 여기서 ‘언어’에 해당하는 원어상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므로, 언어 문제란 바울이 구약 성경을 풀이하여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는 것에 관한 문제임을 의미하며, ‘명칭’에 관한 문제란 사도 바울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예수가 그리스도라 부를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임을 의미하며, ‘법’에 관한 문제란 유대인의 법 즉 율법에 관한 문제임을 의미합니다. 총독 갈리오는 유대인들의 고소 내용을 듣고, 이것이 유대인들의 종교에 관한 문제라고 명확히 판단하고,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은 재판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 스스로 해결할 것을 명령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오늘 본문 16절 말씀입니다.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니”
총독 갈리오는 바울을 고소했던 유대인들을 법정에서 쫓아냈습니다. 원어성경은 갈리오 총독이 군인들을 동원하여 그들을 강제로 법정에서 몰아냈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총독 갈리오는 유대인들의 고소를 종교에 관한 문제라 여겨 기각하면서 법정을 산회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유대인들은 갈리오 총독의 기각 선고를 듣고도 물러나려고 하지 않고, 갈리오 총독을 설득시키기 위해 법정에 계속 남아,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자 총독 갈리오는 자신의 명령에 불복하며 억지떼를 쓰는 유대인들을 자신의 부하들을 시켜 법정 밖으로 강제로 몰아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법정 밖에서는 유대인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 17절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
모든 사람이 법정 밖으로 내쫓긴 유대인 가운데 ‘회당장 소스데네’를 붙잡아 법정 앞에서 때렸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사람’이란 법정을 참관하고 있던 고린도의 헬라인들로 추정됩니다. 당시에는 법정이 지금처럼 밀폐된 건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공개적인 장소였으므로, 아마도 고린도의 헬라인들은 지나가는 길에, 유대인들의 무리들이 바울을 끌고 가 소란스럽게 고소하는 것을 보고, 자연스럽게 법정을 참관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 또한 총독 갈리오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이 말하는 바울의 고소내용들이 억지 주장에 불과하며, 종교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총독 갈리오가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유대인들의 고소를 기각시키는 것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총독 갈리오의 명령에 굴복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며, 강제로 그들을 법정에 몰아낼 때까지 소란을 피우자, 고린도의 헬라인들은 유대인 무리의 총 책임자로 보이는 회당장 소스데네를 붙잡아 집단 폭행을 가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바울을 고소하는 일에 회당장 소스데네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회당장 소스데네는 유대인 무리를 통솔하여 바울을 붙잡아 법정으로 나아갔을 것이며, 총독 갈리오에게 왜 바울을 고소하는지 그 내용을 진술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총독 갈리오가 그의 고소를 기각했을 때에도, 아마 소스데네가 앞장서서 가장 많은 말을 하며 갈리오 총독을 설득하려 들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고린도의 헬라인들은 자연스럽게 그를 유대인들의 총책임자로 여기게 되었던 것이며, 이에 그를 붙잡아 집단으로 폭행을 가한 것입니다.
원어성경은 헬라인들의 폭행이 한 동안 지속되었으며, 그에게 심한 폭력을 가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소스데네를 비롯한 유대인들에 대한 헬라인들의 분노가 얼마나 큰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8장2절 말씀을 통해 살펴본 것처럼, 2년 전 로마에서 종교적인 문제로 유대인들끼리 폭동이 일어나자 글라우디오 황제는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해 버렸습니다. 이 일을 비롯하여 그리스와 로마 사회에서는 반유대주의 경향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속 헬라인들 역시도 소스데네를 비롯한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며 그들의 오만방자함에 대해 반유대주의적인 감정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에 집단적으로 회당장 소스데네에게 심한 폭력을 행사한 것입니다. 결국 소스데네를 비롯한 유대인들은 바울을 무고하게 고소함으로 위해를 가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회당장 소스데네는 헬라인들로부터 큰 해를 당하게 되었으며, 고린도에서 유대인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한편 법정 앞에서 회당장 소스데네가 헬라인들로부터 집단 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보고도, 갈리오 총독이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으며, 심지어 소스데네와 함께 온 유대인들마저도 아무도 그에게 도움을 주지 않고 방관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바울을 악랄하게 괴롭혔던 소스데네를 향한 하나님의 지엄하신 이 땅에서의 심판임을 본문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영적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앞서 말씀드렸듯이 지난 주 우리가 함께 본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며, 그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시면서,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고, 믿음으로 다시 힘을 내어 고린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가르쳤습니다. 오늘 본문 속 사건은 그런 사도 바울의 믿음에 주님께서 보여주신 응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속 소스데네를 비롯한 유대인들의 사도 바울에 대한 대적은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지만, 주님은 사도 바울이 자신에 대해 입을 열기도 전에 갈리오 총독을 사용하셔서, 그들이 바울을 해할 수 없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라는 당신의 약속을 주님께서 지키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내용이 고린도에서의 사도 바울의 마지막 행적임을 볼 때, 이 일이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1년6개월 동안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믿음에 대한 주님의 응답하심이 그에게는 그 어떤 장애물이나 방해에도 이전처럼 두려워하지 않고 주어진 사역을 온전히 감당할 힘과 능력이 되는 귀중한 영적 경험이었던 것입니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갈리오 총독의 이번 판결이 선례가 되어, 유대인들이 종교적인 문제로 더 이상 바울을 비롯한 복음 전도자들을 고소할 수 없게 됨으로, 바울의 선교 활동이 용이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유대교 열렬한 지지자였던 포패아 사비나와 네로 황제가 결혼한 주후 62년경까지 복음 전파에 순풍이 불게 되었습니다. 즉 갈리오 총독의 이번 판결이 적어도 10년 간은 복음 전도자들에게 용기와 힘을 실어준 결과를 낳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믿음대로 행한 자들에게 놀라운 역사로 응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본다면, 만일 주님의 말씀에 믿음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결코 주님의 이와 같은 놀라운 역사를 경험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환상 속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고도, 그것을 단지 무의식중에 든 자신의 망상으로 치부해 버리고, 자신의 생각대로 고린도를 떠났더라면, 주님이 자신을 위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그는 결코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믿음대로 행했기에, 환상 속에 자신에게 약속해 주셨던 주님께서, 정말 자신을 위해 친히 역사해 주시는 분이심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렇기에 그는 고린도 뿐 아니라 로마에서 순교하는 그 순간까지 우리가 아는 위대한 사도 바울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그분의 말씀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뒤집어 말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 그 말씀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진실이 아닐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면서 그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의 말씀대로 살 때, 우리는 참 믿음의 사람이 말할 수 있을 것이요, 본문 속 바울처럼 나의 입을 열기도 전에 나의 믿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항상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분의 말씀대로 행함으로, 그런 내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만, 우리 앞에 어떤 대적이 와도, 또 나를 해롭게 할 수 있는 어떤 순간이 와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나의 신앙을 지키며, 내 삶에 부여된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야만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이 땅을 새롭게 일구는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가,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감으로, 그런 내게 응답하시고 역사하시는 주님을 경험함으로, 일평생 여러분의 모든 신앙의 삶들이 풍성한 영적 경험들과 은혜로 충만할 수 있기를, 이를 통해 어떤 장애물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고, 언제나 승리하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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